분쟁 군사

베트남 전쟁당시의 이야기

박 영희 2009. 5. 23. 19:52

당시 LIFE지에서는 주월 한국군을 소개하며
월남전에 색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 한민족의 태권도를 보여 주었다.

맨손으로 시멘트 불럭을 격파하는 병사들...

'따이한은 손이 칼이래...'

'저 시멘트 불럭은 정말 단단합니다. 저도 한 번 깨려다 손이 다 찢어진
적이 있었지요. 시범용으로 만든 불럭이 아니라서..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무술시범.. 여기서 적의 기를 꺾고 들어갔다.
적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따이한 무서운 놈들이야..'
'우린 치고 박고 하는 백병전으로 가면 안돼... 하고
'


이 베트콩은 어쩌다 잡혔나

그들은 잡혀도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베트남 군에 이첩하면
수용소에 있다 3개월 후에석방되어
다시 산에 나타나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것이다...



수용소에 있는 베트콩들...
'
석달만 주는 밥 먹고 쉬다 갑시다.'
'동지는 어디 소속이었소?'
'나는 빈딩 쪽이라오... 그러는 동지는...' 그러며
그들은 이렇게 이빨을 까면서 시간을 죽였다.




당시월남전에 참전하였던 미국사람에게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어떠했냐고
물어보면 10명에 8이나 9명은 엄지 손가락을 올린다.
'__ 아미(ROK Army).. 정말 터프했어...
'




맹호 포병부대의 사격 장면



대민사업의 하나로
가끔 주민들에게 선물도 가져다 주지만...





간호장교..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나자
남베트남에 대하여 아는 지식은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희망이나 긍지를 가진 지도층은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런어두운 세상 속에서 도
직분에 충직한 자는 존재하였다


남 베트남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군인들의 이야기.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미대사관 옥상에서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조국을 탈출하려는 대열에 끼어들지 않고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질 조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군인들이었다.



라이케이에 주둔중이던 보병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젊은 사관생도들이
사이공을
지키겠다고 결사 항전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사이공에 남아있는
패잔 병력과 합류하기 위하여

5
천의 사단 병력을 이끌고 월맹 1군단 병력이
포위하고 있는 사이공 외곽 포위망을 뚫으려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괴멸되고

4
30일 사이공의 함락과 함께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



[레웬비 장군]


1972년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월맹과 베트콩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90킬로 떨어져 있고 캄보디아에 인접한 도시 안록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바로 그 공격에서 안록을 지켜낸 영웅이 리반흥 장군이다.

안록 전투를 끝내고 제4전선 사이공 남부에

베트남 농산물의 중심지이자 메콩 델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칸토로 부임해서 그 지역을 평정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여 공산 월맹군과 베트콩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의 용맹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군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해 4,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들은 최후의총알 한발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으나

4 30일에 대통령은 항복선언을 하였다.

[리반흥 장군]

4지구 전선 사령관 웬코어남 대장으로 부터항복명령을 직접 전화로 전달받자
그동안 군인정신으로 지켜온 자신과 패망한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며
부하들과 처자식에게 안녕을 고하고 벨트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4지구 전선 사령관 웬코아남 대장은
부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주였다
.

430일 밤 11 30분쯤 레반흥 장군과 전화 통화를 하였다.

"레장군, 덩반민 대통령에게서 항복 명령을 받았네..
이제 우리는 나라를 잃었어.."


레반흥 장군과 통화를 끝내고 그의 방에서는 한방의 총성이 들렸다.

그 소리는 명예로운 그의 생을 일찍 마감하는 서글픈 소리였다.






[
웬코아남 대장]

사이공 남쪽에 위치한 수도를 지키는 보병 7사단장
탄반하이 장군은
군에서 잘 알려진 호탕하고 솔직하며
청렴 결백한 군인이었다
.

그가 7사단장이 되기 전에는 특수부대장으로
상업지구 초론에 침투한 적을 소탕한
공로가 있고
한때 전국 경찰국장으로 재직 했을때 보여준
청렴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 역시 사단본부 사단장실에서 권총에 실탄을 장전 하고
총성을 울리며 세상을 떠났다.

[
탄반하이 장군]


2지구 전선 사령관 판반푸 대장은 공수부대 출신으로
우리 한국군이 주둔하다
철수했던 지역을 지휘하던
총사령관이었다
.

그는 2지구 전선이 캄보디아 국경 근처
풀레이크에서
전선이 붕괴되고 엄청난 병력과 물질적인 손실을 보자
패전지장이 되어 사이공으로 후퇴하여 사이공에 있었다.

미대사관에서 사이공을 탈출할 수 있도록 연락이 왔지만
패전지장으로 나라를 잃게 하였는데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고
미대사관의 호의를 무시하고
4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자결을 택하였다.

[판반푸 대장]



[
캉가루 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호옥칸 대령]


호옥칸 대령

그 역시 전쟁 속에서 자결한 군인으로 포함시키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

수색 정찰대 소속 장교로 군에 첫발을 디딘 후 1974년에는 베트남 남쪽
깊숙한
추옹티엔성 성장으로 임명되고 일년 후 사이공이 함락되고
항복을 선언한 상태에서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 남은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기관총을 들고
부대원들과 성청을 지켰다.

마침내 그가 체포되어 속칭 월맹군의 캉가루 군사법정에서 갖은 곤욕을 치루며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을 때 노란 바탕에 적색 세 줄의 무늬가 가로로 치여진
조국의 깃발에 마지막 경례를 하고 세상을 떴다.

"아~ 조국이여..."


[당시빈 소령의 사체]

당시빈 소령

그의 시체 옆에 남겨진 유서가 주변 친지들의 마음을 울렸다.
덩반민 대통령이 항복선언을 하고 난 2시간 후
그는 가족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집에 부처님 모시는 작은 사당에서
7
명의 자녀와 아내를 차례로 사살하고
자신의 목숨도 끊었다.

그의 죽음 곁에 남겨 있는 유서에는 지금돈 미화 500불 정도의 가치를 지닌
월남돈과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져 있었다.


존경하는 이웃이여,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와 저의 가족은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여기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떠남으로 여러분에게 불편을 끼쳐 드리는 군요.

끝으로 적지만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남겨 놓고 떠나오니

저희를 땅에 매장하는 비용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빈 올림





P.S. 사이공이 함락하기 전 수안록 마을에서 5천의 병사로
4
만의 월맹군을 막아 내었던 다오 장군은 포로가 되어
17
년간 정신 개조 및 재교육 수용소에서 세월을 보내다 미국으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