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진 이야기

12/03-06 박 영희의 신혼때 이야기

박 영희 2012. 3. 6. 19:17

나는 1963년 3월 내 나이 35세때

다섯아래인 내 쌕씨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다음해 64년 2월에 큰딸이 그 다음해 65년 6월에 둘째딸이

그리고 한해두고 65년에 코롬보계획으로 6개월 해외에 나가있어서

66년에는 출생이 없었고

다은해 67년 5월에 셋째가 태여 났습니다

1968년 3월에는 저의쌕씨님은 8월에 출쌩할 넷째애를 인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결혼식을 아주 절약형으로 했습니다

식장을 고향후배의숙부 예식장(종로5가 동원)에서

청소비 정도만 지불 하고

식장사용은 吉日이고 吉時이기는 한데 화요일이 되였고

시간은 오후 02;30 이 였습니다

결혼 사진은 군 선배인 장군님이 최신의 장비로 찍어 주셨습니다


그 시대 에는 피로연에 식사제공이 금지되여 있었습니다

하객에 대한 점심식사 대접은 생각도 못하는때 인데

기념 품으로 접시나 보자기를 예물로 나누어 주는 시대 였습니다

그련데

제가 전파상(라디오상)하다 영화제작을 하는데 이승만님이 상영 못한다 해서

돈이 영화에 물려있고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나 해서

종교인들을 찾아 다니며 사정도 하고 내용을 손봐서 상영할 기회는 없는가 하고 영화상영의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한편 으로는 매형님 병원에서 일도 돌봐 주면서 茶馬費를 밭아 쓸때인데

마침 체신부 에도 납품하는 친구 형님이

사람 살려달라 고 나를 찾아와 사정을 합니다

몇일을 신촌 뻐스정거장 근처에 기다렸 답니다

때에 새로히 개발된 색동 비닐피복 케이불를 만드는 電線공장인

三盛電線에서 도움을 달라해서 이회사에 관여 하다보니

푸라스틱 이나 나이롱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을 알게되였고

푸라스틱 생산공장의 몇사람이 프라스틱 접시로된 예물 답예품 을

500 여개정도 를 만들어 주겠답니다

그래 결혼에 쓴 비용이 소공동의 양복 값을 포함해서 6천월이 들엇습니다

결혼 날자를 잡고 혼수나 예장 이야기가 있엇습니다

낙원동의 가구상 엘 가보니 자게 이불장 9자 하나가 10여만원 하는데

광화문 직장(KIT)에서 같이 근무하든 동료가 낙원동 큰 가구상의 아들인데

마음에 드는 가구 봐놓고 자기한데 이야기하면

어데 것이고 반값 이하 에 준다고 합니다

그것이 9자짜리 자계장인데 화장때 끼워 5만원 정도로 견적이 되였습니다

그러나 충신동 누나집의 내방에는 이것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 돈으로 갖어오라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색씨한데 줄 예물은 북에서 나올 때 어머님이 주신

다이야를 누님이 갖이고 있엇는데

이것을 쓰기로 했습니다

당시 3,5 라면 보통보다 위이고 내 영세성 신세에는 알맞은 정도 입니다

그리고 우리색씨는 은행에 다녔는데 밭는 월급이

공무원 사무관급인 내돈의 배정도가 되였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제대한 사내 부족하고 여자는 경혼하면 직장을 그만 드는데

그 사표내는 시기가

나 시집 잘간다 하는것은 호장 하기도 해서인지

결혼식 하기전에 사표를 내는것이 관예 인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사람 한데 부탁 했습니다

결혼 하고도 6개월은 다닐수 있으니

6개월후에 직장을 그만두어 달라 했습니다

한데 처가집에서 이의가 있었습니다

그래 제가 처가집 어르신과 만났 습니다

정월 연휴의 둘째 날에

큰 처남 입니다

20살정도 연세인데 재무부 에서 운전수 딸린 관용차 타시는 분인데

반도호텔 옆 아사원 미닫이 문 있는 방에서

형님 하고 부인(아주머님) 만났 습니다

나는 이동내 취미가 없씁니다

집사람 세번째 만났을 때 인데

중신한 군대친구 하고 부인하고 네사람이

한일은행 지나 백화점 골목 지나 외교그라부 옆의

돌로 지운 중국집 으로 갔는데

자리를 정하고 앉으라 해서 앉으니 어저다 음식을 식혔는데

그값이 내 원급 3개월 분인데 바다의 상어 뻐다귀 요린인데

중국 먹거리 라면 짜장면 밖에 몰랐는데 저녁값이

짜장면 50그록 값보다도 비싼 값이고

갖이고간 돈은 턱도 없이 모자 랐습니다

외상은 않 된다하고 시계 저당도 않 된다하고

우리사람이 돈이 내라해서 친구 부인한데 돈빌려 값을 치렸는데

아사원 길하나 낀 그동내 이니

이것 회담이 잘 풀리지 않겠는데 하는예감이 들었지만

없는 것은 없는것인데 고리 대금 빌러 결혼할 수는 없고

배째라 마음먹으니 말이 잘 나왔 옵니다

나는 장사하다 욕심부려

영화 만들다 종교문제로 이승만님이 않 된다해서

필림을 안양에 묻혀두고 있는데

신문에 공무원 모집한다 해서지원해서공채 시험 에서

예비시험 -본시험 보고 그간 임시적 공무원 으로도 있었고

5급 을류 로 임용되고 -사표내고- 4급공체보고 -또 사표내고

3급을류 예비 시험보고 - 총무처 본 시험보고 지금에 이르렸 습니다

그래도 내 노력으로 강의도 맡고 원고도 쓰고

월급외 정당한 수입이 있는곳이 공무원 훈련소 여서 이곳에서

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 않드리는 결혼식을 할렴니다

우선 결혼식을 합니다

예식장 청첩장 인쇄 모다 준비 되였습니다

예식장, 하객 예물부걸혼 예물은 마련 되였습니다

새색씨 사표제출은 결혼후 6개월후로 해주시고

결혼 당일 예식장에서 접수하는 축의금은

저 두사람이 쓸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장은 집을 산 다음 갖어 오는데

옷장 이불장 을 같이 보았는데 값이 5만원되는데

돈으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려면 결혼식을 올리고 집을 구하고 집에 알맞은 가구를 사고

하겠습니다

우리 결혼식은 돈을 않들이는 방향으로 결혼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돈이 남으면 그것으로 집도 구하고

나머지로 가구 생활 용품을 구하겠습니다

가구도 5만원 상당의 어마 어마한 옷장을 보는데

나는 집도 없습니다

옷장 놓을집이 없어 돈 으로 갖어오기로 부탁하고

그려 하겠다고 약속 했습니다

색씨의 직장 그만드는 것인데

석달월급 이면 냉장고가 한대 인데

시집와서 그만두면 이것은 나와 같이 관리 하는돈이 됩니다

이 결혼 하는데 소요 되는돈은

않이 써도 흉보고 써도 욕먹는데 저는 절약하고 않 쓰려합니다

우리 일생에 복 되라고

축의금으로 주는 돈을 알뜰하게 쓸려고 합니다

큰 처남하고 아주머님이 웃는다

예장 없이 오라해서

집안 어르 신이나 주변 친지가 굼금해 해서 알려 했었다

자네 색씨감은 우리 집안에서는

越南한(하나여자獨女)여서 어르신들 관심이 그려 하다네 한신다

그리고 집안 어른이신 할아버지 할머니 노할머니 한데

말씁 드리고

사촌 집들 한데에도 우리의 의사를 전하겠다고 말 하신다

(처남댁 삼촌 사촌 되시는 분이 열집 정도 되였다)

결혼하고 나는 결혼비용을 절약해서 종로구 충신동에

집 두채를 마련했다

한채는 네거리에 있어 전포와 집세 수입이 내 공무원 월급 값이다

그리고 또 한채의 잡은 대지 50평에 동아리집 인데 부엌 두개에

방5개 여서 보증금 으로 밭은돈이 집값을 충당하고도

남어지가 15만원이 되여 2만원을 친구 한데 무이자로 빌려

청량리 기차역 뒤 동대문구 전농동에

땅 30평에 방세개 인 새로지운 한옥을 하나사고 이사를 했다

그동안 나는 근무처가 원효로 훈련소 교관 하다

옆집연구소로 가서 새로운 책보는 공부 하며

주요 용품 국산화 에 성공하고 나라밖으로나갔다

다시 광화문으로 옴겨 젔다

몇 년이 지났다

하루는 지방출장을 갔다 추력으로 돌아 오는데

청량리에서

시내 진입을 하지 말란다 그래서 청냥리 역근처 목용탕에서

몬지을 싣고 해산 하고 집으로 돌라왓는데

애들을 찾으니

큰애하고 둘째가 동내 애들하고 학교놀이를 한다면서

킅길를 몇 개 건녀고 복잡한 시장을 지나 3-4킬로 떠려진

소학교에 가서 동내에서 같이놀든 학교다니는 애들하고

노래도 부르고 글자도 배우며 놀다 온단다

그래 물어 물어 찾아 가니

얼골이 까망고 손은 그림그린 색 연필로 색동이가 되고

그래 놀랐다

종로의 누님한데 이야기를 했다 유치원 보네야 겠다고

몇일있다 누님동내 소학교에서 청강하는 학생으로 학교에 나오란다

큰애는 6세 나이다

그래 정규 학생보다 두살이 어리지만 청강생으로 입학을 했다

월요일이 되면 보네주는 자동차로 누님집에 가서 학교 다니다

토요일에는 전농동 집으로 온다

한데

한살아래 5살되는 둘째도 같이 따라 다닌다

둘째애 생일 상



1968년 3월 18일이; 월요일 이다

누님집 에서 차가 와서 큰애는 충신동에서 내려놓았는데

둘째가 않내리고 나하고 같이 간단다

그래 광화문에서 나는 내리고 보낼려 했는데

광화문에 오니 내리지 않고 떼를쓴다

사무실까지 대리고 올라 왔다

한데 3층계단에 올라 서자

자석식 전화기의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뒤여가 잡으니

부산건설국장 최석환 선배님의 다급한 목소리 이다

부산시외국 불났어

여기구포 나반 인데

소장 김동환 바끌께요

오전 07;20 경이다

김동환 님 원효로 훈련소 교관요원 으로 3년을 같이 근무했다

그리고 시외회선 성능항상작업 조사요원 으로도 같이 일했고

장거리 시외회선 의 통제와 통계에 유능하다

물어보는 사항을 요령있게 알려온다

부산시에서 외부로연결된 720 여개가 않된단다

부산은 통신적으로 외부지역과 고립되여 있다 않된다

8층 5-6층 2층의 통신통료가 불에 타서 녹아 버렸다

각층 방안의 시설피해는 모른다

물을 뒤집어 쓴 것은 사실이다

복구 전망은

오래 걸린다

새로 개통한지 60일 미만이고 새로운 시설이고 숙련된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