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공;최성규님

 

 

 

 

 

 

 

 

 

 

 

 

 

 

 

 

 

 

 

 

 

 

 

 

 

 

 

 

 

 

 

 

 

 

 육군보병제8사단(오뚜기부대)이 6,25전쟁기간 中 가장 많은 戰死者를 낸 부대”라고 밝혔다.

6·25전쟁 당시 전투를 수행한 사단은 1, 2, 3, 5, 6, 7, 8, 9, 11, 12, 수도사단이다.

8사단 정훈공보참모 임문택(학군34기) 소령은 그 이유를 ▲중공군 2차 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와 ▲ 6·25전쟁 最多 전투 참가 기록(약 158회)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특히 ‘최다 전투 참가 기록’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방일보는 “11월24일부터 시작한 중공군 2차 공세는 중공군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라고 적고 있다. 중앙일보 2010년 1월15일字 白善燁(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大韓民國》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전쟁 내내 국군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이 여러 면에서 미군에 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동쪽 전선에 있던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예하부대인 국군 6사단과 7사단, 8사단도 인원과 장비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렸다. 동쪽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서 그 서쪽에 있던 미군의 형세가 매우 위험해졌다. 잘못된 판단이 거듭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들(美軍)은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에 대해 방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軍隅里(군우리)에 진출하면서 미군은 그 지형적 조건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국군 6, 7, 8사단과 9군단 예하 美2사단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軍隅里(군우리)까지 철수했다. 이곳에서 다시 중공군과 만난 韓美 兩國軍은 3일 동안 激戰(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 大敗했다. 이것이 ‘서부전선 최악의 전투’, ‘인디언의 笞刑(태형)’이라 불리는 ‘군우리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는 특히 터키 여단의 활약상이 컸다. 그들의 방어로 퇴각로가 조기 차단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패배 후 美2사단은 평양 이남으로 퇴각했으며 국군은 38선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다.

1951년 발행된 美 10군단 지휘보고서는 중공군 2차 공세 이후, 육군 8사단은 장교 323명, 병사 7142명의 병력손실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3사단과 5사단(약 3000명)의 피해(白善燁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大韓民國》 中에서)를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임문택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후 우리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청천강에서 38선 부근까지 퇴각해야 했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23일부터 26일까지 육군 6사단이 UN군과 국군 중 최초로 韓滿(한만)국경 압록강 楚山(초산, 注-‘楚山 진격전’)까지 치고 올라갈 때 8사단의 10연대도 바로 밑 熙川(희천, 注-평안북도 희천군)이라는 지역까지도 확보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과 북괴군은 UN군을 타깃으로 삼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했던 한국군만을 집중 공격 했습니다. 중공군의 主 공격대상 부대가 육군 1, 5, 6, 8사단이었고 그 중 8사단은 후방지역 방어를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8사단은 6·25전쟁 기간 중 영천전투(1950년)를 비롯,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勝戰했다. 총 158회 전투에 참가, 154회 참가한 육군 6사단 보다 많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영천지구 전투(1950.9.4~9.13) - 영천 봉화산, 태약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 15사단을 완전 궤멸시킨 전투. 8사단의 戰功(전공)을 대표하는 전투이다.
*홍천ㆍ횡성 부근 전투(1951.2.5~2.12) - 원주ㆍ홍성ㆍ횡성線에서 敵 7사단, 12사단 병력 섬멸.
*노전평지구 전투(1951.2.12~10.28) - 강원도 인제군 노전평 부근에서 敵 2ㆍ13ㆍ15ㆍ45사단 격멸. 적 4990명 사살, 포로 1094명.
*백석산지구 전투(1951.9.30~10.1) - 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요충지인 백석산을 점령하기 위해 적의 기선을 제압한 전투. 敵 101명 사살, 포로 24명.
*인제지구 방어전투(1952.3.23~10.20) - 인제에서 벌어진 主 방어 임무수행 전투. 敵 319명 사살, 포로 1명. 

 

 

 

625 한국전에서  많은 학도군 전사자를 배출한 중학교

(당시 5년제)

 

군산중학교(현 군산고교)로서 63명.

2위는 경북中(現 경북高) 53명,

전주북中 52명,

경주中 48명,

제주 서귀포 농업中(現 서귀포 산업과학高)·군산 상업中 각 45명,

순창 농림中 37명,

서울中 30명 등.


Posted by 박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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