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시 1952년 여름 진귀한 칼라 사진.



사진들은 미 한국군사고문단(KMAG) 일원으로 한국에 온
육군 대위 '존 랜돌프 코플랜드 3세'가
1952년 여름 후방 지역의 군대와 그 주변 정경을 찍은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사진들이다.

1952년 여름,
전쟁은 3.8선에서 교착 상태이고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 었으니
한국은 폐허 그 자체였었을 거다.

그는 당시 코닥 콜름이라는 칼라 필름을 사용했으며
최근에 다시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것이다.

모두 280장의 가까운 사진을 찍었는데
코닥 필름의 따뜻한 아나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그 당시 피폐한 민초들과 군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한 칼러 화질로 볼수 있어 흥미롭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 사람들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웃고, 울고, 애 낳고, 소풍 가고, 삶을 이어 아니, 견디어 냈고
그들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하에 산업화의 기수가 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안락한 삶과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사진 속의 그들도
60년 뒤의 한국이 지금처럼 변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부여 교차로에서 손 글씨로 쓴
커다란 이정표 간판. 표어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대구 시 풍경.



대구 근처 어느 시장.
구한말이나 볼 수 있었던 백의 의상이
그 시절까지도 범용되는 사진을 보니 놀랍다.

서울과 지방, 도시와 시골의 생활 수준이 격차가 극심했던 걸로 추측된다.









공주 부근 '갑사'라는 절에
미 고문단과 공주 유지들이 방문,
현지 주민과 스님들이 도열해 환영하는 모습.
동원된 초딩애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한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이 실현되서 우리가 그 혜택을 받고있다.



왼쪽 대위가 이사진들을 찍은 코플랜드다.



이성가 소장.





군사고문단장(?) 힐 대령과 제2훈련소 소장 이성가 소장.
그는 미국 정부가 준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힐 대령과 이성가 소장, 챈 준장, 그리고 미군 통역관.
힐 대령은 연세로는 이성기 소장 삼촌 뻘된다.
군 설립 초기라
지휘관 부족으로 무공의 인한 승진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중대장하고 장군하고 거의 나이가 비슷했다.
백선엽 소장도 52년에 4성 장군이 되고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그의 나이 32살이다.



새빨간 고추가 불편하도록 아름답구나!









논산의 미 군사고문단 산하 제2신병훈련소.
열악한 시설로 인해 보기에는 포로 수용소같지만
급조한 미 교관이 통제하는 훈련소다.






대구의 고딩들의 행진.



고딩 소풍.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똥폼 잡는 것은 똑같구나.



저 뒷산이 부산의 황련산이라고 한다.
부산수컷들아, 맞노?











KMAG(한국군사고문단)



중앙이 코플랜드 대위.



기지에서 배식 받는 미 병사들.







젖가슴을 드러낸 이유는 아들을 생산했다는 자랑(?), 표시라 한다.
일본 강점기 때 교육으로 거의 사라졌지만
시골에선 아직 그 풍습이 남아 있었던가 보다





이성가 장군.



짭밥! 맛 있겠다.



신병훈련소 짭밥 준비 중.





헬기에서 내려다 본 대구 시 전경.
왼쪽에 대구의 랜드마크 격인 대구 교회가 보인다.



소매에 미8군 마크로 보아 사령부 소속 중위 같고
옆에 세련된 외모의 여성은 직업이 뭔지 모르겠다.





2차대전에 활약한 빈티지 구축 전차 'M436' 한국군에 인도되는 모양이다.



포로가 아니고 논산의 제2신병훈련소에서 신병 훈련 중이다.
외국 불로그에선 포로로 포스팅되어 있다.








부산항.













이성가 소장은
6.25 초기부터 많은 무공을 세운 30살(?) 백전노장(?)이었지만
51년 12월 1.4후퇴 때 그의 8사단이 철수 중 임진 강변에서
북괴군 패잔병 부대의 습격으로 병역의 상당수가 몰살당해
그 책임으로 군법에서 사형이 구형, 집행 유예로 복직 등...
근신 의미로 훈련소 소장으로 좌천된 걸로 보인다.







출처: http://blog.daum.net/dkk36/6054294

 


 

 

 

 

 

 

 

 

Posted by 박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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