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글쓰기 가 않 되였는데

새벽 2시에 열렸 습니다

DONGPHA 형님이서울에서 있는

모임의 사진을 보네 왔습니다

이것 밭고 회신 못 드리면 어쩌나

무척이나 마음 썻는데요

동기생 들이 감사의 징표도 드렸습니다

이것 누구나 밭씁니까

사랑을 배풀고

자존심 강한 무리의 존경을 밭어아

밭는것이지요


또 두분의 전우가 가시고

모임 에 참가하신 동기는

건강 했습니다


제손에 남아 있는

년차 동기생 모임의 -모여사진- 입니다

두 친구가 보고 싶어

같이 있는 그림을

찾아 올립니다


- 09 Dec 2009-

동기생 여러분 건강 하십시요

형님 감사합니다

1952년봄에 빼풀어준

형님 가정의 환대와 선심을

두고 두고 씹고 있습니다

참호 에서 나와 맨손 으로 한푼없이

육본에

M2 메고 출장온

냄새 나는 산 사람 같은 몰꼴을

머리 깍아주시고

목욕 식혀 주시고 먹여주시고 재워 주시고

형수님과 큰 형님은

장군 같은 옷과 목이긴 군화도

구해 입혀 주시고 ---

큰 형님집 집마당 우물까 에는

매화끛이 피고 있었고

건강 하십시오

다음날

회의 하는데 소위는 나 혼자 뿐이고

모다 찦차 타고온 높은 사람

미국사람 투성인데

배덕진님

나보고 어제 산사림 맞아요 -

손 잡아주고웃으 셨다

형님 도 같이

                          M2 와 육군본부 SCR-609 회의

[결론]

609 갖이고 산악 지역에서 전투 했습니다

아래 작전기간

나는 장교 입니다

않 통하게 후투려놓은 609-- 3대를

이 회의실에서 5 분내에 주파수 조정 했습니다

귀 부태 통신병 우리부대 보네주면

5 분내에 609 통 할수있는 능력만들어

보네 겠습니다

한발 나가서

지휘관이 관심 갖이면

609 500개 정도는

소대 정비 반이

10시간이면 통하개 조정 됩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계획

1951년 말 국군의 후방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비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이후 퇴로가 차단당한 북한 인민군 패잔병과 호남·영남지역의 지방공비들이었다. 이들은 점차 전투력을 재정비한 후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전투근무지원 시설 등을 위협했다.

육군본부는 호남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던 이들 공비의 수를 총 4,000명 정도로 판단하고, 후방의 암적 존재인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완전 섬멸하도록 했다.

지리산 공비는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구성되었다.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와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전역에까지 파급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국민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육군본부는 후방지역 군사시설 보호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호남지역에서 준동하는 공비를 섬멸하기 위해 2개 사단 규모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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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사의 지리산지구 공비토벌 작전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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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2군단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벤플리트 제8군사령관, 신임 제2군단장에는
백선엽 중장이 임명되었다.

1951년 11월 25일 백야전전투사령부(이하 백야사)를 설치하게 됐으며, 사령관에는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 참모장에 김점곤 대령, 작전참모에 공국진 대령, 정보참모에 유양수 대령, 군수참모에 장우주 중령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 그리고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 및 경찰부대가 배속되었다. 백야사는 전주로 이동하여 11월 26일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서남지구 공비토벌 임무를 인수함과 동시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와배속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육본은 백야사의 설치에 따라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속초와 춘천에서 호남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양개 사단의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경비부대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백야사는 육본의 작전계획에 따라 양개사단의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경비부대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정부는 12월 1일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서 공비토벌작전을 위한 1단계 조치를 취했다. 또한 이 지역의 민간인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간의 전화 교신도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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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사는 1951년 12월 2일부터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했다. 이 작전은 4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됐으며, 각 단계별 작전은 엄격한 통제하에 기동타격부대와 저지부대 그리고 거점수비대로 운용했다.

기동타격부대는 공비의 주력을 포착섬멸하고, 저지부대는 충분한 종심을 두고 배치하여 공비의 퇴로를 차단 저지하면서 기동타격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작전명 쥐잡기(Rat Killer) 작전은 제1기작전(1951.12.2~12.14), 제2기작전(1951.12. 16~1952.1.4), 제3기작전(1952.1.4~1.31), 제4기작전(1952.2.4~3.14)으로 구분하여 실시했다.

제1기 작전기간 중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종합전과는 공비 사살 1,715명, 생포 1, 710명, 귀순 132명, 소총 509정, 자동화기 86정, 수류탄 676발, 백미 769석, 벼 416가마에 달했으며, 잔여공비들은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과 은거지를 버리고 토벌부대를 피해 분산 잠적했다.

제2기작전은 전주를 주목표로 하여 그 주변의 산악으로 공격방향을 변경했다. 12월 19일부터 1월 4일에 이르기까지 국군8사단과 수도사단은 고지를 오르내리며 험한 지형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를 함정에 넣도록 행동했다. 백야사는 작전이 개시된 이후부터 12월말까지 공비 약 4천명 이상을 사살하고 약 4천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달성했다.

제3기작전은 호남지구 공비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재잠입하게 되자, 지리산·백운산·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공비잔당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백야사는 제3기작전에서 공비들의 핵심지도자로 활동하던 자들을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획했다.

제4기작전(52. 2. 4-3. 14)은

제8사단이 1 9 5 2년 2월 5일 전선으로 복귀하고,

백야사도 2월 6일부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작전을 수도사단이 전담하게 되었다. 수도사단은 백아산·모후산·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과 반복수색을 전개했다. 이 작전이 종료되자 수도사단은 3월 1 4일부로 임무를 서남지구전투사령관에게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함으로써 백야사가 계획했던 임무는 모두 완료되었다.

제1기부터 제4기까지의 작전기간 중 백야사의 전과는 사살·포로·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했다. 육군은 1951년 11월 25일 백야사를 전주에 설치한 이래 12월 초순부터 그 이듬해 3월 14일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한 결과 남부군을 비롯한 공비 주력을 격멸했다.

백야사는 육본계획에 따라 수도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춘천으로 이동한 후, 화천에서 제2군단으로 발족하여 수도·제3·제6사단을 예하에 두고 금성방면의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갖어오기; http://blog.yahoo.com/_4SMYPV7PVF74AUMGFQ25NBPH64/articles/32822

Posted by 박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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